◎ 일 정
▫ 2015년 7월 16일
- 18시 출발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식당에서 예비역 선배와 만찬.
- 방산회관에서 숙박.
▫ 7월 17일
- 양구군 해안면 편치볼 제 4땅굴 견학
- 을지 전망대 견학
- 두타연 둘레길 워킹
- 파서탕 길 드라이브
- 방산회관에서 숙박.
▫ 7월 18일.
- 평화의 댐 견학
- 한반도 섬 견학
- 추곡약수를 들러 원주 도착.
이 여행을 계획해 놓고 며칠밤 잠을 설쳤다.
지금껏 방치해 두었던
너의 가장 처절하고 암울했던 시절의 흔적을 더듬어
괜한 상처를 받지 않을까 싶어....
하지만 삼십 수년전
그 고통의 날들을 온 몸으로 버텨냈던 네가 있었기에
지금 내 존재의 필연성을 깨달은 후부터
꽤 긴 세월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왔다.
결국 오늘
너를 품기 위해서 찾은 이 곳에서
내가 기억하는 너를 말하기 까지.....
집안의 기둥인
한전에 다니던 큰 형의 실직과 관련된 사건들이
당사자의 과실로 밝혀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대쪽 같으시던 아버지마저 쓰러지시고
가족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막내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입대였다.
논산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한 달 가까이 대기병 과정을 거쳐 배치된 동부전선 최전방 부대.
행정병을 꿈꾸던 내게 수색대란 이름이 붙여지면서
16주라는 피나는 훈련을 마치고 투입된 GP.
항상 북한군을 시야에 두고 생활해야하는 긴장감.
유일한 낙인 고향집 소식은 늘 참담하기만 해
입영기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인 면회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군기가 빠졌다.-는 공식적 명목 하에
엄마가 보고 싶어도 맞고,
여자 친구의 편지가 뜸해져 심란해도 맞으면서
그렇게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고…….
“·마음이 여려 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작은형 걱정과는 달리
독기만 남은 나를
고참들은 무던히도 괴롭혔다.
아무리 맞아도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내 졸병들은 때리지 않는,
그게 나였다.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어느 날 면회를 다녀온 동기 혁이가 창고에서 소주잔을 건네며 한 푸념에
“내가 맞았다고 나도 때려야 하는 그 흐름이 유치해서 싫어!”
그랬다, 너는…….
그 시절
죽을만큼 힘들었던 너의 이십대 초반에.........
* * *
낙하훈련을 받다가 발목을 접었다.
의무대에서 기브스를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도 거부했음은
GP 투입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서 였는데
나를 비롯한 부상자들 때문에 투입이 늦어져
고참들은 밤만 되면 줄빠다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동기들이나 졸병들에겐 미안했지만
유급되어 낯선 단체에 혼자 남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연대본부에서 면회 통보를 받았다.
반가움과 설렘에 발목의 고통도 잊은 채 2시간 이상을 걸어 마주한 정문 면회실.
딱딱한 나무 탁자에 빵 몇 개, 통닭 몇 조각을 놓고…….
몇 년을 함께해 얼굴만 봐도 속을 읽을 수 있는 그녀가 왠지 낯설게 느껴질 때 즈음
마침내 약혼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부모의 성화에…….그것도 내가 아는 선배와……. 핑계 같은.........
"군 생활 내내 하늘만 보면 네 얼굴이 떠올랐어." 라는
내 말은 하기도 전에…….
한 움큼 먼지를 뿌리고 떠나는 양구행 버스에 그녀를 실려 보내고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미닫이문이 몹시 삐거덕거리는 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서 단숨에 마시기까지…….
자대로 복귀하는,
북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시 앉았는데
마침내 가슴속에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시린 총부리 잡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삶의 무게보다 죽음이 더 가벼워 질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죽음보다 더 철저하게 나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았다.
야간점호가 막 끝난 내무반.
면회를 다녀오면 당연히 사들고 오는 담배나 과자 봉지가 아닌,
늘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참나무 몽둥이를 한 아름 안고 들어섰다.
“오늘은 이 몽둥이가 다 뿌러질때까지 한번 쳐 봅시다”
내무반 바닥에 내 팽개친 몽둥이 더미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질려있는 고참들 얼굴보다는
고향에서 줄곧 같이 온 입대동기 혁이란 놈의 애처로운 표정이
클로즈업되면서.........
결국
난 그해 초겨울
육군 **사단 수색대를 떠났다.
1981월 11월
* *
* * *
군 생활 절반을 남겨 놓고 보병대대 본부중대로 전속.
전투훈련과 체력단련만 하던 수색대와는 많이 다르다.
행정, 군수, 통신, 취사 등, 각기 다른 업무를 하면서도 소속은 같아
위계질서가 유지되는…….
“군대에서 배운 거라곤 몸으로 때우는 거 밖에 없습니다.”
행정업무를 강요하는 중대장님께 취사장 근무를 고집했다.
낯선 무리속에서 한 두 사람과 부딪치는 것 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치유의 세월
형처럼 보살펴 주던 고참들이 줄줄이 떠나고
선임이 되어 나란히 형제 같은 졸병들 6명과 더불어 지내다
마침내 전역하기 까지.......
1983 년 6월 24일.
* * *
용서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하는 것이다.
고통이 무디어 졌을 때
사람보다는 그때의 상황을,
상황보다는 그 시대를 통째로 내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트라우마!
살아오면서
내 실수에 대해선 스스로에게 참 가혹했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비겁하지는 말자! "
결국
그 하나를 지키기위해
발버둥 친 삶이었지만.........
2015. 7.16 ~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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